1부, 마약 중독은 영성 치유가 효과적이며 빠른 치유가 가능하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본문
이명훈 교수
가설; 중독은 영성 치유가 효과적이며 빠른 치유가 가능하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영성을 말할 때 개인의 내면적 경험, 가치관,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개념을 말한다. 이는 종교와 관련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종교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영성은 자기 자신과의 연결,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우주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명상, 자연 속에서의 시간, 예술, 감사 등을 통해 경험할 수 있으며, 각 개인에게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
종교적인 영성이란?
특정 종교적 전통이나 교리를 바탕으로 한 내면의 경험과 신성한 존재와의 관계를 의미하면서 신앙, 기도 예배, 의식 등을 통해 나타나며, 신, 성인, 또는 초월적인 힘과의 연결을 찾는 과정이며 종교적 영성은 개인의 삶에 깊은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공동체와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각 종교 마다 영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성한 것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 이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의미하며,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된다.
기도; 하나님과 소통을 통해 영적인 깊이를 더하는 과정이다.
말씀 묵상;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3. 예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행위로 공동체와의 연결을 강화한다.
4. 사랑과 봉사;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5. 성령의 인도; 성령의 역사에 따라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이다.
결국, 성경적 영성은 하나님 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방식이며, 이를 통해 개인의 영적 성장과 변화가 이루어진다.
성경적 관점으로 거룩 회개 믿음 다른 점은 진리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알고 싶어 하는 것과 그 노력(도, 닦는 듯한 은사 추구 사이에서, 은사 나타나면 영성이 뛰어나 보여? 그러나 이것도 무시할 수 없으나 예배와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인도와 치유하심으로 서의 정도의 행함과, 기도와 영적인 성숙함으로 질그릇의 보화 같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경외함과 영 분별하는 삶이라고 말하고싶다.
<중독의 치유와 회복은?>
뇌와 마음 그리고 삶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중독은 마음과 영적인 문제이며서 뇌의 문제”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이적 존재(in-between being)라고 생각하는 데 고립이나 혼자의 경우에는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고 하며(존던의 시“누구도 섬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인 병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감옥 안에서의 독방은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벌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사회적 고립은 스스로 만든 감옥의 독방이다. 인간은 본래 관계하고 어울리는 존재로 그러할 때에 가장 많이 웃고 행복해 합니다. 인간다움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일까? 관계적인 기쁨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관계적인 두려움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자리하면 방어적이 생기고 담을 쌓게 된다. 이 과정은 이웃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담을 쌓게 만든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단절과 고립 그리고 고통일 것이다. “담”이라는 책이 이를 잘 설명한다. (“담”,글로리아 제이 에번스(Gloria Jay Evans)의 저서)
주인공은 사람들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벗어나려는 본능적으로 담을 쌓기 시작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에 갇힌 고도가 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견딜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 속에 울부짖기 시작한다. 중독 전문용어로 말하면 “바닥치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중독 치료의 시작은 이렇게 진솔하게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자신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치유와 회복 과정은 하나님과 더불어 상처받은 자아와 자연을 비롯한 모든 이웃과의 재결합(reconnection)하는 긴 과정이라 할 수 있다는 데 절대적으로 공감을 한다.
증독은 궁극적으로 영적 문제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레리가레(religare)’에서 왔는데, 이는 다시(re)와 묶는다(ligare)의 합성어로 “다시 연결한다”또는 “재 결합한다‘라는 뜻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영혼이 회복될 때 상대적으로 중독은 그 힘을 잃게 된다.
중독의 치유와 회복은 이러한 재결합의 긴 과정이다(토마스 무어의 ”영혼의 돌봄” 머리말 중에서, 20세기의 큰 병은 영혼의 상실로서 그것은 ‘강박관념’이나 중독 증세, 폭력 그리고 의미 상실 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오락과 권력, 성적 만족, 물질적인 것들을 동경하는 데 (기독교에서는 세속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함) 영혼이 없이는 무엇을 찾아도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중독 치유와 회복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를 하셨기에, 하나님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 마음이 쉴 수 없다.”라고 한,“한 때”에 ‘중독자였던 어거스틴’의 말을 되새겨보자)
1, 불안정한 영성과 12단계 대화 치료
사막의 교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만일 네가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먼저 너 자신에 대해서 알도록 하라”고 말했다. 칼뱅도 “기독교 강요”에서 첫장을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주제로 시작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로 시작된 것을 보면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시작인 것 같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고백을 하므로서 성령과 주님을 만나게 된다.)
나(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인 (A.A)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인생지침서인“불완전한 영성”이라는 책에서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의 가장 비극적인 실수는 시작된다’ 고 말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본질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야누스 신화나,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꺼내지 않더라도, 생물학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다. 생체 호르몬, 즉 흥분과 억제 호르몬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살아 숨을 쉬고 움직인다. 잠이 들려고 하면 편안하게 이완 시켜주는 억제 호르몬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반대로 하루를 시작하려면 흥분 호르몬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박경리 선생은 “모순”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버리고/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절대적 이 상극의 틈에서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 생명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
여기에서 물과 불은 억제 호르몬과 흥분 호르몬은 물론, 인간과 인생 자체를 은유적으로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는 부조리와 혼돈, 어둠, 고통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조리 속에서 의미를 찾고, 혼돈 속에서 평화를 구하며, 어둠과 고통 가운데서 빛과 기쁨을 찾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 상극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모습을 말한다.
어니스트 커츠와 캐서린 케첨은 이를 “불완전한 영성”이라 표현 했는데, 이 불완전함의 영성 은 고통의 불가피성을 말하면서도 그 고통 속에서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다.
(어니스트 커츠Ernest Kurtz 와 캐서린 케첨Katherine Ketcham의 “불완전한 영성”) 이 불완전한 영성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한 말에 나타난다. 어떻게 이보다 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이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인 의인과 죄인을 사용하여, 절묘한 질서 가운데 각 단어의 의미를 초월해 실존적 진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실존이란 개념이나 이론을 떠나 경험적, 임상적, 실제적, 현실적이라는 말로 대치를 할 수 있다.)
상반된 두 개의 가치가 어울려 모순이 될 수 있고 역설이 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네모난 원’은 모순이지만, “거룩한 죄인”은 역설이다. 역설은 표면적으로는 모순이지만, 더할 나위 없는 진실을 선포한다. 모순은 비현실적이지만, 역설은 현실을 정확히 보여준다.
불완전함의 영성이란 이 역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며 견뎌 내는 것이다.
성인과 죄인 양쪽 중 하나가 아닌 양쪽 모두라는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양쪽 중의 하나,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어야 한다는 강요는 역설을 뿌리치고, 따라서 영성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완전함의 영성 P121)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런 역설을 품고 사는 불안전 존재이다. 이를 이해 하고 받아들여서 사는 것이 불완전함의 영성의 핵심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이 인간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는 실존으로의 부름이요, 모든 영성의 시작인 정직함과 겸손의 부름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의 믿음 생활에서 죄인의 고백과 낮아짐)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제 아무리 기쁨과 행복을 추구해도 슬픔과 고통은 그림자같이 늘 동행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중독자들은 늘 오로지 기쁨이 전부이고, 슬픔과 아픔은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견디고 성숙해야 할 때 오히려 부정하고 통제하며 회피하려 한다. 그로 인한 대가가 온갖 신경증과 중독이라 할수 있다.
양면성을 끌어안는 참된 영성만이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과 재결합 되는 과정인 것이다.
A.A모임은 늘 “평온을 구하는 기도문(Serendipity prayer)”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accepting) 평온을, 바꿀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소서(grant)...죄로 물든 세상을 내 뜻대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accepting), 주님 뜻에 맡기는 동안 주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 임을 신뢰하게 하소서”(taking as Jesus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it ; trusting that You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surrender to Your will’ )로 되어있다. 이는 모든 신의 행세를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accepting)해 달라는 기도문이다.
예수께서 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독보리(,가라지)뽑아 버릴까요?’물었을 때 주인은 아니다, 독보리를 뽑다가 밀(곡식)까지 뽑을까 걱정된다. 추수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그냥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독보리를 뽑아 단으로 묶고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모여들이게 하겠다(마13장 25-30)러고 말씀한다. 내 뜻되로 되지 않는 삶을 제거하려 애쓰지 말고 주님이 바로 세우실 때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라는 것이다. 중독 치유가로서 일하면서 얻은 가장 축복된 경험을 말하라고하면 주저 없이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모든 문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종과 통제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통제 중독자인 중독자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요구이다. 그들에게 통제를 내려 놓는다라는 것은 거의 죽음이다.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 하면서도 끝가지 통제하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비참함에 빠지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게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란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간질로 고통을 받는 딸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아버지가 예수님게 도움을 간청했을 때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 순간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아뢰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장 23-24)
간청한다. 이 간청은 중독자들의 마음의 외침이기도 하다. 인간이 찢어진 자아를 받아들이고 또한 찢어진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 무엇이든 자신에게 가능한 치유를 바라게 되고 따라서 최대한 온전해지게 되는 것이다.(불완전한 영성

